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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근면 성실함과 ‘빨리빨리 정신’

Activities October 18, 2017

[국제신문] 변영재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칼럼

 

최근 미국의 세탁기 세이프가드 가동 관련 뉴스를 보면서 필자가 20년 전 미국에 처음 유학 갔을 때가 문득 생각이 났다.

1998년 당시 미국 가전제품 전문상가를 가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찍힌 한국제품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유학생으로서 미국 상점에서 익숙한 브랜드를 만나는 일은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상점 입구에 전시된 최고급 프리미엄 세탁기는 모두 미국산이었고, 한국산 브랜드들은 ‘저가상품’ 코너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수출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자부심이 느끼기에 충분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고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전자제품 상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상점 입구를 차지하던 프리미엄급 제품 대부분이 대한민국 브랜드로 전시돼 있지 않은가? 세탁기는 물론 냉장고 TV 스마트폰 등 그 가게에서 내세우는 ‘프리미엄’ 제품이 바로 한국산이었다.

전자제품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1990년대 말 한국산 자동차는 ‘싸구려’ 브랜드 이미지에 ‘저품질’을 대표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불량품’을 표현하는 대명사처럼 한국 브랜드를 들먹일 정도였다.

지난해 미국에 갔을 때 모습은 완전 달랐다. 우선 공항에서 차를 빌리려 하니 친숙한 한국 브랜드 자동차가 즐비했다. 도로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었다. 20년 전 한국차는 특정계층 사람들이 주로 소유했던 것과 대비해 미국 도로에서 마주친 한국 자동차들을 다양한 사람이 운전하는 것을 보고 뿌듯한 자부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출시되는 한국 자동차들은 더는 가격이 싸지도 않다. 미국이나 유럽 자동차와 비교해 같은 세그먼트에서 가격이 심지어 더 비싼 경우도 있다.

어떻게 20년 만에 대한민국 제품들이 ‘싸구려’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직업의 특성상 전 세계 많은 나라 사람과 교류할 기회가 많은 필자로서는 한동안 우리나라에 만연한 ‘빨리빨리’ 태도가 불편한 적이 많았다. 식당에서도 주문하고 조금만 늦게 나와도 짜증을 내는 손님이 있어, 주인들은 빨리빨리 음식을 내어주고, 배달음식도 빨리빨리 가져다주지 않으면 한소리 듣기에 위험천만하게 오토바이를 모는 배달족이 있는 것 같았고, 막히는 길인데도 1분이라도 더 빨리빨리 가고자 하는 운전자들 때문에 한국 도로에서의 운전 스트레스는 정평이 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작업 현장이나 일터에서도 만연해 있다. 상사가 무슨 일을 시키면 빨리빨리 해결해야만 인정받는 터에 야근하는 일도 많게 되고, 금요일에 시킨 일은 주말에 근무해서라도 빨리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혼나는 일이 허다했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한동안 사회적 분위기가 마치 ‘빨리빨리 태도’는 나쁜 것인 양 몰아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 때문에 야근도 많이 해 인간다운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세상이다. 또 부실공사로 이어져 인재가 발생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여기서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쟁력인 ‘근면 성실성’이 아닌가 느껴진다. 단순한 태도가 아닌 ‘빨리빨리 정신’의 장점을 보자는 뜻이다.

IT(정보기술) 업계에 몸담고 있는 공학자로서 정말 세상에서 아주 독보적인 원천기술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면, 기술 수준은 ‘도토리 키 재기’처럼 경쟁사별로 비슷비슷하다. 결국 대한민국이 20년 전 ‘싸구려’ 제품을 주력으로 하던 위치에서 오늘날 ‘프리미엄’ 제품을 싹쓸이하는 위치에 오르게 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빨리빨리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니었을까?

시야를 더 확대해 사드 문제와 한미 FTA 문제 등에서 ‘빨리빨리 정신’을 활용해 초기에 대응했다면 이렇게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이럴 땐 ‘빨리빨리’ 하고, 저럴 땐 소위 ‘천천히 미학’을 발휘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세계적 경쟁력을 가져다준 ‘빨리빨리 정신’을 나쁘게만 보지 않고 발전적으로 승화해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한때 대한민국의 브랜드였던 ‘근면 성실함’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변영재 울산과학기술원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10월 17일 국제신문 30면에 ‘[과학에세이] 근면 성실함과 ‘빨리빨리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출처: UNIST 뉴스센터